승자의 저주와 경매이론

경매에서 가장 좋은 가격을 받는 방법

승자의 저주

부동산 경매는 은행이 압류한 집을 법원에 맡겨서 진행하는 경매절차입니다. 보통은 부동산 경매를 통해 집을 더 저렴하게 살 수 있는데, 경매에서 부동산을 시세보다 비싸게 사는 경우들도 종종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죠.

또 권리관계와 같이 복잡한 내용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 경매에 들어가서 낙찰받은 물건 때문에, 법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드는 비용이 많이 나와 패가망신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경매에서 승리한 사람들이 종종 망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는 사실에 주목한 스탠퍼드 대학교의 두 경제학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로버트 윌슨 교수와 폴 밀그럼 교수로, 이들이 주목한 것은 바로 경쟁에서는 이겼지만 과도한 대가로 인해 오히려 위험에 빠지게 된다는 ‘승자의 저주’였습니다.

경매이론

경매이론은 게임이론의 한 분파로, 복잡한 시장에서 적절한 상품 가격을 알 수 없을 때 경매를 통해 적정한 가격을 도출할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로버트 윌슨 교수와 폴 밀그럼 교수는 기존에 미술품 등에 적용됐던 경매를 라디오 주파수나 항공기가 이착륙할 수 있는 권리 등의 ‘보이지 않는 상품’에 대한 가격을 매기는 데 어떻게 적용할 지를 연구하며 업적을 쌓았는데, 이 연구를 지속한 이유는 ‘무선통신 주파수’나 ‘활주로 이용 권리’ 등은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캔커피처럼 단순한 재화나 서비스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판매자에게 얼마를 받고 판매하느냐에 따라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의 편익을 크게 높일 수도, 낮출 수도 있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무조건 높은 가격을 써내도록 유도하는 경우에는 서비스의 공급자가 지나치게 높은 가격을 책정하게 만들기 때문에 사회적 편익을 감소시키는 부작용을 낳게 된다는 것이었죠.

로버트 윌슨 교수와 폴 밀그럼 교수는 이렇게 전통적인 방법으로 사고팔기 어려운 상품과 서비스를 어떻게 경매를 통해 합리적인 가격에 거래를 성사시킬 수 있는지 연구했는데, 로버트 윌슨 교수는 1960년대 부터 1970년대 사이에 내놓은 논문들을 통해 수학적으로 이런 사실을 증명하기도 했습니다.

투명한 정보제공

부동산처럼 시장에서 ‘대충’ 예상하는 가치가 정해져 있는 상품을 경매에 내놓는 경우에는 사람들이 너무 높은 가격을 써내면 패가망신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생각하는 가격보다 낮은 가격을 써 낼 수밖에 없겠죠?

특히 해당 부동산 물건에 어떤 법적 불확실성이 있는지 모르는 경우일수록 가격은 떨어질 수 밖에 없는데, 해당 부동산의 권리관계에 대해 경매 입찰 참여자들의 정보 수준이 다를 수록 일반 입찰자들은 더 낮은 가격을 써 낼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에 대한 로버트 윌슨 교수의 해결책은 아주 심플했는데, 모든 참여자들에게 정보를 투명하게 제공하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부동산 경매를 통해 물건을 판매하려는 사람 입장에서는 법적 불확실성을 줄이고, 입찰 참여자들에게 공정한 정보를 제공하면 할수록 훨씬 비싸게 물건을 팔 수 있다는 말로, 정보의 비대칭성을 제거하고 경매에 입찰하는 사람들에게 정보를 투명하게 제공할 수록 더 나은 결과가 나온다는 이론입니다.

주파수 경매

로버트 윌슨 교수와 폴 밀그럼 교수는 앞에서 살펴본 이론적 배경을 바탕으로 새로운 경매방식을 직접 고안해 냈는데, 이를 계기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1993년에 미국은 주파수를 통신사들에게 경매로 팔기로 결정했는데, 경매방식이 문제였다고 합니다. 정부 관계자들은 다음과 같은 문제에 직면했던 것이죠.

  • 어떻게 팔아야 정부 입장에서 돈을 많이 남길 수 있을까?
  • 어떻게 팔아야 낙찰자가 승자의 저주에 빠지지 않고 안정적인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부 경제학자들은 주파수를 순차적으로 팔라고 조언했습니다. 즉 뉴욕주에서 주파수를 먼저 팔고, 그 다음에는 텍사스주에서 주파수를 파는 식으로 하나씩 하나씩 파는 방법이었는데, 이렇게 하나씩 팔아야 주파수를 사는 기업, 즉 통신사가 충분한 정보를 취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폴 밀그럼 교수는 완전히 반대의 주장을 펼쳤는데, 주파수를 하나씩 파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50개 주에 있는 주파수들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충분히 공개한 다음 한꺼번에 팔라고 조언했습니다. 왜 이런 조언을 했을까요?

부동산을 예로 들면, 만약 서울 강남의 비슷한 아파트 10채가 경매에 나와있을 경우, 파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파는 것이 더 유리할까요?

만약 경매로 한채씩 팔게 되면 입찰자들은 눈치를 서로 눈치를 보게 될겁니다. 즉 서로 경쟁자들이 덜 몰리고 가격이 더 싼 부동산을 사기 위해 경쟁하게 되는 상황이 펼쳐지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서로 눈치를 보며 경쟁을 하게 되면 어떤 부동산은 가격이 크게 하락하는 경우가 생기게 되고, 결국 한채씩 경매를 하다보면 10채의 부동산들이 각각의 부동산에 대해 서로 경쟁하는 시스템이 만들어집니다.

하지만 사전에 물건을 미리 공개하고, 10채를 동시에 입찰하도록 진행한다면 10채의 부동산들이 서로 경쟁하는 일 없이, 적정한 가격대로 입찰을 하게 되겠죠?

폴 밀그럼 교수는 이런 이론을 바탕으로 ‘주파수 경매’라는 방식을 고안해냈습니다. 주파수를 하나씩 순차적으로 팔지 않고 동시에 판매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이 경제적으로도, 세계적으로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 미국의 FCC는 1994에서 2014년까지 1,200억 달러 어치의 주파수를 판매했습니다.
  • 같은 기간 동안 글로벌하게 이 방식을 사용한 경매금액은 2,000억 달러에 달했습니다.
  • 미국을 비롯하여 핀란드, 인도, 캐나다, 노르웨이, 폴란드, 스페인, 영국, 스웨덴, 독일 등 거의 모든 나라에서 이 방식의 경매를 사용합니다.

스타트업과 데모데이

현대의 비즈니스 시장에서 폴 밀그럼 교수의 경매이론을 가장 효과적으로 적용하고 있는 곳은 바로 스타트업데모데이 행사입니다.

보통 스타트업 데모데이 행사에서는 여러 스타트업들이 등장하고 벤처투자자들이 그들을 지켜보다가 관심있는 곳에 투자하게 되는데, 데모데이를 개최하는 주최 측인 엑셀러레이터들은 스타트업들에게 최대한 투명하게 자신들의 정보를 제공하라고 독려하고, 투자자들에게는 기간을 정해두고 해당 스타트업에 관심이 있으면 언제까지 투자하라고 이야기합니다.

바로 밥 윌슨과 폴 밀그럼 교수의 이론을 적용하고 있는 것이죠. 즉 1) 투명하게 정보를 제공하고, 2) 동시에 경매를 진행한다는 원칙이 적용되고 있는 것인데, 실제로 이런 스타트업 데모데이 행사를 통해서 많은 스타트업들이 적정한 가치로 평가되고 투자를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이론적인 바탕을 잘 모르는 스타트업들은 데모데이를 꺼리기도 하는데, 밥 윌슨 교수와 폴 밀그럼 교수의 이론에 따르면 데모데이 행사는 스타트업들이 적절한 가치로 거래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만큼 이런 행사를 적극적으로 이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타트업 데모데이 행사는 스타트업 회사가 주식을 제 값 받고 팔 수 있도록 정교하게 설계된 경매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GPT-3를 개발하는 오픈AI의 공동설립자이자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 엑셀러레이터인 와이컴비네이터의 회장이었던 ‘샘 알트만’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YC데모데이는 스타트업들이 벤처투자자들에게 투자를 구애하는 행사같이 보이지만, 사실 거꾸로 벤처투자자들에게 지금이 아니면 뛰어난 스타트업에 투자할 기회를 놓칠 수 있다고 선언하는 이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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